6백 년 전 이야기 – 강근숙
조선 시대 27명 임금 중 가장 비운의 왕은 누구일까.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 흥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하여 거론되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은 단연 단종이다. 세종의 원손이자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난 이홍위李弘暐1441~1457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생모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이튿날 세상을 떠나,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는 자기 아들은 유모에게 맡기고 어미 잃은 왕자를 보듬어 길렀다. 그러나 열 살에 할아버지 세종이 돌아가시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은 서열이 가장 높은 어른이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시대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이 여럿이다. 성종은 13살에 즉위했으나 할머니 정희왕후와 장인 한명회가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12세 명종도 어머니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해 그 누구도 왕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순조는 11살에, 그의 손자 헌종은 겨우 8살에 즉위했지만, 순원왕후와 안동김씨가 정권을 독점하여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2세 고종도 대왕대비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단종에게는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가 없었다. 어머니처럼 보호막이 되어주던 혜빈양씨가 있었으나, 선왕의 후궁은 힘이 부족했다
문종은 죽기 전 고명대신에게 어린 아들을 간곡히 부탁했다. 단종은 세손과 세자를 거친 가장 정통성을 지닌 왕이었으나,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단종 편에 선 사람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겁에 질린 단종은 왕의 자리를 내려놓으며 자신을 길러준 혜빈양씨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세조는 아버지의 후궁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의 죄는 목숨 걸고 단종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단종 복위 계획에 실패한 사육신死六臣(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그 아내와 딸들은 계유정난 공신들과 관청의 노비로 보내졌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에게,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에게, 유성원의 아내와 딸은 한명회에게, 하위지 아내와 딸은 권찬의 노비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편을 죽게 한 원수의 노비가 되어 모욕적인 삶은 사는 것은 죽음보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중에 박팽년 둘째 며느리는 관노로 귀양 간 상태에서 친정에서 아들을 낳았다. 마침 같은 시기에 딸을 낳은 여종이 ’충신의 가문이 끊겨서는 안 된다‘며 아이를 바꿔, 박비朴婢라는 노비의 이름으로 박팽년의 핏줄을 이었다.
조선의 긴 역사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한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세종의 치세가 남긴 찬란한 문화적 성취 뒤에는, 세조의 찬탈로 인한 깊은 상흔이 겹겹이 드리워졌다. 단종 편에 서서 수양의 야욕을 막는 방어벽 역할을 하던 안평대군은, 단순한 왕족이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에 능통한 삼절이라 불린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뛰어난 감식안으로 엄청난 양의 소장품을 모았는데, 신숙주의 화기畫記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중국 당. 송. 원나라 대가들의 작품을 포함해 총 222점의 명화와 다수의 서예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세조는 피를 나눈 형제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죽이는 것도 모자라, 평생을 걸쳐 수집한 방대한 예술품을 한 줌 재로 만들고, 당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의 글씨, ‘경오철자庚午鐵字’ 원본까지 녹여 없앴다.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용瑢은 족보에서 지워지고, 조선이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행히 꿈을 꾸고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한 점은 화마를 피해 살아남았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가 안견이 그린 이 그림은 20미터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형태로 꿈의 내용을 직접 쓴 안평대군의 발문을 시작으로, 김종서, 이현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정인지, 신숙주 등 당대 조선을 움직이던 최고의 문신과 학자 21명의 친필 찬시가 적혀있다. 기록 유산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이 귀한 국보 <몽유도원도>는 한국이 아닌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안타깝다.
다시 찾은 금성대군 신단

역사의 비극은 예술의 소실에 그치지 않았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세조의 찬탈을 끝까지 반대하며 단종을 지키려다 순흥부로 유배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영남지역 선비들과 군사를 모아 거사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에 가담한 이들은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청다리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순흥부 30리 안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지금의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잇는 청다리 아래서 죽계천을 따라 10여 리까지 피가 흘러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당시 순흥부에는 700여 호가 있었고, 한 집에 십여 명이 넘는 대가족이 살았다. 아녀자만 남기고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면 희생자는 3~4천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주실록榮州實錄에는 ‘수많은 선비와 백성이 희생되었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이 거두어 길렀는데, 그 아이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 불렀다’고 기록했다. 오늘날 아이에게 장난삼아 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 속에는, 570년 전 순흥 땅에서 자행된 참혹한 역사가 숨어있다.
숙종 대에 이르러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역적의 고장’이라는 낙인이 찍힌 순흥부가 회복되면서, 순절한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 만들어졌다. 정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금성대군 신단에는 신단비와 삼위三位의 제단이 자리한다. 비석에는 ‘유명조선 단종조충신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有明朝鮮 端宗朝忠臣 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 새겼다. 삼위三位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이름 없는 군사들의 넋을 기리는 제단으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제주를 한 병 가져와 술 한잔 올릴 것을’, 뒤늦은 후회를 하며 조선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고려 후기 유학자 안향1243~1306의 고향이며,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宿水寺 옛터에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과 후진 양성을 위한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훗날 풍기 군수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의 소수紹修란 사액을 명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유서 깊은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죽계천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맞은편에 이황이 세웠다는 작은 정자 취한대翠寒臺는 한가롭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죽계천을 바라보며 570년 전, 피로 얼룩진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슬픈 역사를 떠올린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줄이 끝이 없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배가 없으면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천연 감옥이다. 한 시간 남짓 배를 기다리며 왕좌를 빼앗기고 유배길에 오른 소년의 처연한 모습을 떠올린다. 강을 건너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지만, 그 짧은 길은 운명을 가르는 길이 되었다. 강가의 수많은 돌탑은 누구의 그리움일까. 노산군이 머물렀다는 배소配所 앞에는 담장을 넘어 절을 하듯 엄흥도 소나무가 허리를 굽히고 있고, 관람객들은 해설사의 설명을 듣느라 움직이지 않는다.
숙종 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영조는 그 흔적을 보호하고자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쓴 비석과 금표비를 세웠다. 원래의 배소는 두 칸짜리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으로, 홍수에 강물이 불면 앞문에서 뒷문으로 물이 흘렀다 한다. 현재의 번듯한 기와집은 단종을 잘 모시고 싶은 영월 군민들의 마음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배소 주위에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호위병처럼 둘러 쌓고 있다. 그중 6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 관음송은 마치 두 팔을 벌린듯한 모양이 신령스럽다. 고립된 공간에서 시름에 잠긴 노산군의 처연한 몸짓을 보았고, 밤마다 쏟아내는 통곡을 들었다 하여, 이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죽음의 공포가 시시각각 조여오는 비참한 유배지, 기댈 곳 하나 없는 가엾은 영혼을 관음송은 두 팔을 벌려 품어주었으리라. 역사를 증언하듯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관음송에 눈인사를 하고, 절벽 끝 망향탑으로 올라갔다.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고 시퍼런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 한양의 아내 소식은 알 길이 없어 하릴없이 돌탑을 쌓던 노산군의 흔적, 천년 세월도 씻어내지 못한 한과 그리움이 서린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어린 소년의 애절함이 전해져 눈물이 차오른다.
한양에서 700리, 영월 장릉

왕좌를 빼앗긴 단종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동강에 버려졌다. ‘시신을 거두는 자 삼족을 멸한다’는 서슬 퍼런 어명에도 영월 호장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단종의 시신을 남몰래 거두어 지금의 장릉 자리에 몰래 장사지냈다. 그 후 엄흥도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아버지의 의리로 인해 그의 자식들은 영월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았다 전한다. 세월이 흘러 영조2(1726)년 그 결의와 충성심을 인정되여 충의忠毅라는 시호와 함께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내리는 최고의 훈장으로, 붉은 현판은 국가가 인정한 충신임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엄흥도는 공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사육신과 함께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영월 장릉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장판옥藏板屋’이란 충신의 명단이 적힌 위패를 보관하는 집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절을 다한 충신들 268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정조 15(1791)년에 세워졌다.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위宦者軍奴位 44위, 여인위女人位 6인 총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이 사당은, 사육신과 생육신은 물론이고, 조정의 관료부터 궁녀나 내관, 이름 없는 노비의 위패까지 모셔져 있다. 바로 옆 배식단配食壇은 매년 단종 문화제나 제향 때 왕뿐만 아니라, 장판옥에 모신 충신에게도 함께 제사를 올린다. 왕과 신하가 죽어서도 함께 제사를 받는 모습은 오직 영월 장릉에서만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영월 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단종 능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불리던 소년 왕은 241년 만에 단종端宗으로 복위되었다. 이름 없는 묘역도 장릉莊陵으로 격상되어 왕릉 격식에 맞춰 석물을 설치하였다. 보통 왕릉은 한양에서 백 리 안팎에 자리하지만, 장릉은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상사화가 핀 완만한 산길로 올라갔는데, 지금은 나무계단이 설치되었고 능침 앞자락에는 사릉思陵에서 옮겨온 정령송精靈松을 심어 놓았다.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산 한많은 여인, 세월을 건너 천상재회를 하는 듯한 가녀린 소나무가 애련하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단종과 헤어진 후, 도성 밖 정업원에서 염색일로 생계를 이으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눈물지었다. 권력의 비정함 속에서도 동네 여인들의 의리와 따뜻함 속에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는 단종보다 64년을 더 살면서 세조와 그의 아들, 며느리와 손자가 요절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던 한명회가 죽은 지 17년 만에 부관참시 되어 거리에 내걸리는 것을 보았다.
진실이 밝혀지려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단종과 사육신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을 넘어, 인간의 의리와 충절이 권력의 칼날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충절이 있었기에, 권력이 지우려 한 이름이 긴 세월을 지나 역사 속으로 돌아왔다.
세조가 남긴 개혁과 잔혹함은 양면으로 평가되지만,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많은 인재를 희생시킨 피의 군주라는 오명을 남겼다. 권력은 이름을 지울 수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 까지 지우지 못한다. 세월을 거슬러 ‘왕과 사는 남자’ 열풍으로 영월은 활기를 되찾았고, 억울하게 스러진 어린 왕을 기억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광천골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싶어 유배지로 자처했던 엄흥도의 소원은 6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영월이 살아났다. 단종은 이제 외롭지 않다. 역사는 그를 잊지 않았으며,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는 영원히 살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