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은 어디인가 -강근숙
이 글은 파주 지역의 왕릉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강근숙 작가가, 조선 왕실의 명당 관념과 그 이면의 권력사를 파주 인릉仁陵을 중심으로 풀어낸 글이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은 나라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믿는 조선 왕실은 능지를 정할 때마다 신중을 기했다. 파주는 한양에서 가까우면서도 산과 물이 조화를 이뤄 능지의 조건을 두루 갖춘 땅이었으나, 강근숙 작가는 그 명당조차 정권이 바뀌면 흉지로 몰려 천장을 거듭했던 역사를 짚는다.
특히 순조의 인릉은 1835년 파주 갈현리 인조 장릉 곁에 조성되었다가, 풍수 결함 논란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권력 다툼 속에 21년 만인 1856년 서울 헌릉 곁으로 옮겨졌다.
강근숙 작가는 이 과정에서 새로 조성된 인릉에 1446년 제작된 옛 영릉과 1517년 제작된 옛 희릉의 석물이 재사용되었다는 점—조선왕릉 중 유일한 사례—에 주목하며, 15세기·16세기·19세기의 양식이 한 능역에 뒤섞인 내력을 소개한다. 이와함께 파주에 잠들었던 왕들의 능이 어떻게 옮겨 다녔는지, 그 배경에 숨은 권력의 그림자를 되짚어 보았다. -파주위키-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란 좋은 기운이 흐르는 자리, 즉 혈穴이 응집된 곳을 뜻한다. 한 왕조의 수도는 물론, 왕릉을 정할 때도 배산임수背山臨水나 장풍득수藏風得水 같은 명당의 조건이 언제나 뒤따랐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국장國葬 공포와 함께 계령戒令이 내려지고, 임시 관청인 삼도감三都監(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된다.
옛사람들은 ‘땅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깊은 믿음이 있었기에, 능을 조성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임무는 무엇보다 막중했다. 국장이 나면 전문 풍수가들은 나라 안의 명당을 찾아다니며 능지를 물색했다. 때로는 왕이 생전에 자리를 정하기도 했는데, 능지를 택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도성 10리 밖에서 100리 이내’였다. 아무리 풍수상 명당이라 해도 도성에서 너무 멀면 공사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이후 왕의 능행이나 관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주는 한양에서 하루 만에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능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땅이 많았다. 조선 시대 파주에는 5기基의 능이 있었다. 현재 조리읍 봉일천 파주삼릉坡州三陵(예종비 장순왕후 공릉恭陵, 성종비 공혜왕후 순릉順陵, 영조의 큰아들 진종과 효순왕후의 영릉永陵)과 탄현면 갈현리에 인조와 인열왕후 장릉長陵이 있으나, 1835년부터 1856년까지 장릉 좌측 능선에는 순조 인릉仁陵이 있었다.
정조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극복하고 정치적 안정과 학문을 꽃피우던 성군이자 천재 군주였다. 개혁을 추진하던 정조가 49세로 갑작스레 승하하자 조선은 구심점을 잃었고, 그의 아들(이홍, 1790~1834)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11세의 나이로 조선 제23대 왕(순조)으로 즉위했다. 당시의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증조할머니(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조정의 전면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는 3년이란 기간 동안 천주교 탄압을 빌미 삼아 유능한 학자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정조의 탕평책과 개혁 정치를 뒤엎어버렸다.
순조는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후, 정조가 생전에 점 찍어둔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자리에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본래 세도世道란 ‘세상世上을 도학道學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조광조의 정치 철학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권세와 세력勢力을 뜻하는 세도勢道로 변질되었다.
김조순이 권력을 잡은 이후 국정의 주도권은 안동 김씨 일문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조정의 요직을 독점했으며, 과거 급제자 선발부터 관직 임명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안동 김씨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의 민란이 잇따랐다. 세도정치로 인해 국정이 심각하게 흔들리던 1834년 11월 13일, 순조는 재위 34년 4개월 만에 45세로 승하했다.
장릉長陵 곁에 조성된 인릉仁陵
순조가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이 8세의 나이로 제24대 왕(헌종)으로 즉위했다. 능지 선정은 초기부터 순탄치 않았다. 1834년 12월 21일, 대행대왕의 산릉을 파주의 운천리 옛 장릉長陵 왼쪽 언덕에 정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때는 한겨울이라 땅이 녹은 뒤에야 산릉 조성을 담당한 당상관과 지관들은 파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능지와 정자각 터를 다지고 장명등, 망주석, 석물 제작을 마쳤는데, 2월 그믐, 수렴청정을 하던 순원왕후가 갑자기 산릉 공사를 중단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국장까지 겨우 한 달을 앞둔 상황에서 산릉을 교하 장릉 부근으로 옮기라고 명시했다.

인조仁祖 장릉長陵 초장지는 파주 북쪽 운천리였다. 석물 틈이 벌어지고, 뱀과 전갈이 나오는 흉조 때문에 인조가 묻힌 지 82년 만인 1731년(영조7) 파주 갈현리로 천장되었다. 그런데 순조純祖 인릉仁陵 또한 운천리의 장릉 초장지 왼쪽 언덕으로 정했다가, 준비가 거의 끝난 상황에서 갈현리 장릉 곁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장례를 불과 한 달 앞두고 ‘흙 빛깔이 좋지 않고, 뇌석牢石이 깨져 재궁이 상할 염려가 있다’하여 장지를 변경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흉지라는 사실을 은폐했다’며 지관 이시복李時復을 참수형에 처했는데, 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 투쟁이 낳은 참극이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상지관이 풍양 조씨 가문과 가깝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국상 중임에도 반대파를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장례일이 촉박해진 탓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면서 산릉도감 제조 이면승李勉昇이 공사 현장에서 과로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섯 달 동안 수많은 난관과 희생을 거친 끝에, 1835년 4월 19일 순조의 능침은 탄현면 갈현리 인조 장릉의 좌측 능선에 안장되었다.
순조의 손자 헌종憲宗은, 1842년과 1847년, 두 차례 인릉과 장릉에 참배하고 파주 행궁에 유숙했다. 철종哲宗은 인릉과 장릉을 1855년 8월까지 무려 네 차례나 행행幸行하였는데, 1년 뒤 지반이 내려앉고 석문 틈이 벌어진다고 천장설이 나돌았다. 현장을 조사한 지관과 조정 대신들은 ‘파주 교하 능자리는 생기가 부족하고 바람이 잘 거둬지지 않으며, 물길이 왕실에 불리하게 흐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땅의 기운과 직결해 보던 시대에, 흉지에 왕이 누웠다는 논란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풍수학적 결함 논란이 지속되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일문은 가문의 안위와 왕실의 번영을 위해 천장을 단행했다. 파주 갈현리 순조 인릉은 21년 만인 1856년(철종7)10월 11일, 인조 곁을 떠나 서초구 태종의 헌릉 곁으로 이장되었다. 살아서도 세도정치 틈바구니에서 고뇌했던 순조는, 죽어서조차 풍수 논란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운명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갈현리 사는 지인 권창택 씨로부터 인릉의 석물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의 밭에는 무인석과 석마가 뒹굴고 있어 아버지가 밭을 갈 때마다 석물을 비켜놓고 갈았다 한다. 이를 탐낸 이웃이 달라고 하여 가져가라 했는데, 그것을 밀반출하려다 발각되어 징역을 살았다고 하였다. 석물이 뒹굴었다는 밭에는 그의 동생이 ‘메기탕 집’을 차렸고, 그 음식점은 연못 앞에 있어 연꽃 구경하고 식사하러 가끔 들리던 곳이었다.
지금은 연못도 메워지고, 음식점도 없어져 지인을 다시 불러 그 자리를 확인하고 구릉터를 찾아갔다. 능선으로 향하는 길목, 계단을 쌓은 돌이 아무리 봐도 장대석이었고, 양쪽으로 세운 돌에는 글씨의 흔적도 보였다. 동행한 해설사들도 분명히 그건 장대석이라고 확신했다. 소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올라가면 능지로 짐작되는 자리에 묘 2기基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국가유공자 무덤이 있었다.

이 묘역은 바로 아래 30년 전에 신축한 집주인의 조상 묘라는데, 마당 가에는 장대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즐비했다. 왕이 누웠던 자리에 조상을 모시고 명당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분명히, 당대 세력가거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집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헌릉獻陵 곁으로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 그곳은 본래 세종대왕이 잠들었던 영릉英陵의 옛터였다.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헌릉 곁에 능지를 잡았다. 지관 최양선이 ‘장손이 끊어질 흉당’이라며 극구 말렸으나, 세종은 “아무리 명당이라 한들 부모님 선영만 하겠는가”라며 그 자리에 왕비를 묻고 자신의 유택으로 삼았다. 예언은 잔인하게 적중해 세종 뒤를 이은 문종이 일찍 승하했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열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과 안평대군,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의 풍수학자들과 조정 대신들은 비극의 예언이 시작되었던 세종의 능 자리를 지목했다.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왕실은 결국, 1469년(예종1)에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였다. 그리고 387년 뒤, 파주 인릉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옮겨온 순조의 안식처가 다름 아닌 왕실에서 버린 세종의 초장지였다. 누구의 의도였을까. 인릉은 1856년(철종7) 10월 11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고, 이듬해 순원왕후마저 승하하여 합봉하면서 태종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이 나란히 지금의 헌인릉獻仁陵이 되었다.

능을 옮긴다는 것은 왕을 두 번 장사 지내는 막대한 국가적 대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옮겨온 순조와 순원왕후 합장릉은 난간석을 비롯해, 석양·석호, 문·무인석, 팔각 장명등에 혼유석까지 왕릉의 격식을 빠짐없이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조성한 인릉의 석물에는 사연이 있었다. 파주 구릉舊陵 터에 기존 석물을 묻고 왔기에, 이곳 인릉을 꾸밀 때는 세종의 옛 영릉과 인근의 장경왕후의 옛 희릉禧陵 터에 남아 있던 석물들을 재사용하였고, 부족한 석물 일부는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왕릉으로서의 외형은 갖추었으나, 짜맞추듯 조성된 단출한 능역에서 외척의 기세에 휘둘리는 순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태종이 잠든 헌릉은 왕권을 향해 질주했던 그 위용을 닮았다. 대개의 왕릉에는 능침을 중심으로 한 쌍의 문·무인석과 두 쌍의 석양·석호가 놓이지만, 헌릉에는 두 배나 많은 거대한 석물이 능침을 호위하고 있어 그 위세가 압도적이다. 태종은 1400년에, 순조는 1800년에 즉위했으나 두 왕이 마주한 조선의 국력과 위상은 엄연히 달랐다.
무덤 주인인 태종의 당당함과 서슬 퍼런 권력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느껴진다. 왕위에 오른 태종의 시선은 늘 미래를 내다보았다. 공신과 외척 세력이 비대해지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세종의 장인과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자신을 보필했던 일등 공신들마저 가차 없이 숙청했다. 세간의 비난을 받은 이 잔인한 숙청은, 세종에게 가장 완벽한 나라를 물려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악역은 자신이 온전히 짊어지고, 아들에게는 강력하고 깨끗한 왕조를 물려주겠다는 군주이자 아버지로서의 철저한 설계였다.
국가 최고의 지관이 잡은 명당조차 정권이 바뀌면 흉지라는 이유를 들어 천장을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풍수지리 문제였으나, 본질은 권력가들의 정적 제거를 위한 정치적 음모였다. 풍수가 나빠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한 가짜 흉지설을 꾸몄다는 것이 역사에서 드러났다.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금, 순조는 마침내 호위무사 같은 조상 곁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태종의 헌릉과 쇠락해 가는 조선 후기의 음영이 서린 순조의 인릉, 나란히 자리한 두 능을 바라보며 파란만장했던 조선의 천장사를 떠올린다.
추정 초장지에서 발견된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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