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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와 땅굴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배움터 – 박충섭

박충섭 AI강사

세월은 참 빠르고도 무심하게 흘러 어느덧 칠십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립니다. 까맣게 잊고 지낸 줄로만 알았던 먼 옛날 피난길 같던 배움터의 풍경이 오늘따라 가슴속에서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1953년 봄부터 1954년 겨울로 이어지던 그 모진 날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초등학교의 교정에서 저는 잿더미를 딛고 일어선 작은 기적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 5월 1일 설립 인가를 받아 사립 파남학교에서 봉일천공립보통학교로 그 고귀한 첫발을 내딛고, 1921년 4월 1일 개교하여 100년이 넘는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의 모교. 그 푸르던 교정에서의 학창 시절을 가만히 회상해 봅니다.

6·25 전쟁의 참혹한 포화가 휩쓸고 간 봉일천 마을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제대로 된 집 한 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정든 배움터였던 봉일천국민학교 역시 무참히 무너지며 검게 타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1953년 4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찾아온 국민학교 입학식은 희망찬 기대와 설렘 대신 참으로 기이하고도 서글펐습니다. 교실은커녕 학교 건물 흔적조차 없던 우리는 인근 문화재인 파주 삼릉의 흙밭으로 변한 잔디밭 위에 모여 앉아 1학년 입학식을 치렀습니다. 청명한 봄 하늘 아래 잔디밭을 교실 삼아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 유랑의 배움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문화재가 훼손된다는 이유로 졸지에 그 잔디밭에서마저 쫓겨나야 했던 것입니다.

갈 곳을 잃은 우리들은 훗날 주한미군 기지인 ‘캠프 하우즈'(Camp Howze) 부지가 된 삼릉 옆 산속, 평평한 땅 한 평 없는 산비탈로 가마니 몇 장을 들고 몸만 겨우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1953년 7월 27일 휴전 직후 미군 부대가 이동하여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로 밀려간 곳이 현재의 봉일천중학교 인근 산비탈이었습니다.

그사이 계절은 한여름으로 접어들었고, 장맛비가 쏟아지자 맨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진흙 속으로 무릎까지 수렁처럼 빠져들었습니다. 교실은커녕 천막조차 없는 맨땅에 가마니 몇 장 깔고, 비에 젖은 책보자기를 품에 안은 채 진흙밭을 구르며 공부하던 그 시절은 생각할수록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절망 같던 배움터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바로 우리가 쫓겨났던 그 터에 주둔해 있던 미군들이었습니다. 미군 장병들은 커다란 불도저와 중장비를 동원하여, 포화로 잿더미가 되어 있던 원래의 학교 터를 깨끗하게 밀고 터를 잡아주었습니다. 비록 교사는 없었지만, 다행히 원래 우리의 정든 터전으로 돌아와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3년의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허허벌판이 된 학교 터에는 살을 에는 칼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그러자 미군들이 우리를 위해 땅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주고, 그 위에 미군 텐트 조각을 덮어 지붕을 올려주었습니다.

어둡고 퀴퀴한 땅굴 속, 텐트 틈새로 들이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손마디가 새빨갛게 마비되어 가면서도, 우리는 책상 하나 없이 가마니 깔린 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았습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모진 한파를 이겨내던 그 땅굴 속에서, 우리는 1학년 시절을 눈물겹게 버텨냈습니다.

그 모진 겨울을 견뎌낸 우리에게 마침내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미군의 한국 민간 구호 사업인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군 장병들이 직접 목재와 시멘트를 날라 단단하고 아담한 새 교사를 지어준 것입니다.

[사진] 1954년 11월 4일 낙성식 공연 후, 어머니께서 등잔불 밑에서 밤새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들어 주신 흰 세일러 제복을 입은 당시 2학년 어린 필자의 모습

1953년 11월 5일, 마침내 신축 교사의 낙성식이 열리던 날. 봉일천 마을 전체가 마치 큰 잔칫집처럼 북적였습니다. 반짝이는 계급장을 단 미군 고위 인사들과 국내 내빈들, 그리고 멀리 고향을 떠나온 미군 장병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나의 어머니는 귀한 내빈들 앞에 서야 할 어린 자식을 위해,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헌 이불보를 잘라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눈부시게 차려입을 흰 세일러 제복을 지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과 깊은 사랑이 가득 담긴 그 흰 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상에 올라섰습니다.

선생님과 따로 남아 몇 날 며칠을 연습했던 무용을 선보였습니다. 땅굴 속에서 추위에 떨던 조그만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예쁜 제복을 입고 무대 위에서 앙증맞게 재롱을 떨자, 엄숙하던 미군 장군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태평양 건너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을 떠올렸을까요. 난생처음 보는 흑인 장병들까지 섞인 미군 아저씨들의 눈가에 어린 따스한 눈빛과, 교정을 가득 채우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는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집니다.

당시 미군용 신문인 《성조지》(Stars and Stripes) 기자가 셔터를 누르며 카메라에 담았던 그날의 풍경은 단순한 행사의 기록을 넘어, 전쟁의 상흔과 땅굴의 추위를 딛고 피어난 인류애이자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동남아 전역과 미국 본토로 전파되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던 한국 어린이들의 생생한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칠십두 해 만에 그날의 유년 시절을 가만히 복원해 봅니다. 삼릉 잔디밭에서 쫓겨나 진흙밭을 구르고, 미군이 파준 땅굴 속에서 겨울을 견디며 춤추던 그 어린아이는 어느덧 숱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단단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따뜻한 배움터를 선물해 준 고마운 미군들과, 자식을 위해 밤새 등잔불 아래서 흰 제복을 바느질해 주시던 어머니의 그 거룩한 손길, 그리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재롱을 떨었던 유년의 내 모습이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적셔옵니다.

그날 봉일천국민학교의 교정에 울려 퍼졌던 박수 소리와 따스했던 햇살. 그것은 제 평생을 떠받쳐준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삶의 서막이자 희망의 찬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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