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1편] -신수현
파주 토박이 신수현 작가가 단편 소설 ‘오독’을 파주위키에 발표했다.
소설 <오독(誤讀)>은 타인의 삶을 각자의 편견과 언어로 잘못 읽어내는 인간들의 잔혹한 본성을 다룬다.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전 직장 상사가 주인공 수연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기자, 세상은 이를 저급한 불륜의 대가로 오독하며 전방위적인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진실은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문학과 영혼으로 연결된 고결한 소통이었다. 본 소설은 세상의 비틀린 시선 속에서도 끝내 서로의 진실을 지켜낸 두 영혼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이해의 의미를 묵직하게 던진다. 총 2편에 걸쳐 연재된다. -파주위키-
그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째, 수연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낯선 여자가 나타나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지?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안개 속처럼 아득했다. 자신을 몰라보는 수연의 태도에 여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찰나의 순간, 그 안면은 사흘 전 그 중년 여자의 형상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여자는 수연을 사납게 쏘아보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비대해진 손바닥이 하늘을 가리며 안면을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수연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는 순간, 번쩍 눈이 떠졌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집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도저히 현관문 밖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목구멍으로 넘긴 것이라곤 간신히 끓여낸 라면 한 봉지와 컵밥 몇 개가 전부였다. 냉장고와 베란다에는 한 달은 족히 버틸 비상식량이 쌓여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진다 해도 새벽 배송을 시켜 문틈으로 들여놓으면 그만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자가 격리시키기에 더없이 충분한 환경이었다.
수연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내일 무슨 얼굴로 출근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이었다. 팀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일주일 전 나성미가 아침 아홉 시 정각에 사무실로 들이닥친 바람에 같은 부서 직원들 모두가 그 끔찍한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나성미는 문이 열리자마자 이수연의 이름을 날카롭게 내질렀다. 자신의 이름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수연의 앞으로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수연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수연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다.
그날 수연은 공포와 경악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뺨을 맞은 건 처음이었다. 불덩이를 얹은 듯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 여자와 단 1초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결국 수연은 일주일간 병가를 냈다.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비워내고 숨을 고를 시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려 할수록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만 갔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출근을 앞둔 마지막 날 밤, 수연은 여전히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마음만 혼란스러웠다.
문득 수연은 화가 치밀었다. 그 여자는 대체 왜, 무슨 권리로 자신을 찾아와 그 난동을 부린 걸까. 세월이 흘러 주름은 깊어지고 살집은 부쩍 늘었지만 수연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서늘하고 오만한 눈매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팀장이었던 도연의 휴대폰 잠금화면 속에서 숱하게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
십 년 전 영업팀으로 근무지가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수연은 진심으로 기뻤다. 새 영업팀장인 장도연의 평판은 사내에서 독보적이었다. 늘 점잖았고 말수가 적었으며 화를 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17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정돈된 인상은 보는 이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까다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질 때마다 팀원들과 야근을 자처하며 꼼꼼하게 책임을 나누던 그를 다른 팀 직원들은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도연은 모든 팀원의 실수를 제 품으로 감싸 안으려 노력하는 리더였다. 직전 팀장의 무자비한 폭언에 영혼까지 털렸던 수연에게 도연과의 협업은 구원과도 같았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직장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수연의 행복했던 출근길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도연이 품질관리팀으로 갑작스럽게 발령받으면서 두 사람의 접점은 급격히 마모되기 시작했다. 치열한 영업 현장에서 악착같이 실적을 끌어올려 과장으로 승진했어야 했지만, 선량한 도연의 실적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밀려나듯 한직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좌천을 부족한 사회성 탓으로 돌렸다. 수연이 보기에도 냉정한 말이지만 틀린 구석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도연은 퇴근 종이 울리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갔다.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은 그를 거대한 조직 속의 외딴섬으로 만들었다. 업무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그는 옥상 구석에서 애먼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그것이 자신의 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유일한 배출구인 양 자욱한 연기 속으로 마른 몸을 숨겼다. 결국 그가 회사를 아예 떠나게 된 건 품질관리팀으로 옮긴 지 2년이 흐른 뒤였다.
“폐암 3기랍니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한 대요.”
도연에게 직접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수연은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어떤 위로도 뱉지 못했다. 치료를 잘 견디고 재발만 없다면 완치도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것은 5년이란 시간을 함께한 단순한 동료애가 아니었다. 성실하고 선량한 한 인간이 삶의 절벽 끝에서 서서히 부서져 내리는 광경을 바라봐야만 하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처절한 측은지심이었다.
그가 회사를 떠나고 5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가끔 휴대폰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건조한 문자가 서로를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항암이라는 고독하고 힘겨운 사투 속에서도 그는 가끔 ‘몸이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보내왔고, 수연은 그 짧은 문장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왜 이토록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에게 신은 가혹한 시련을 내리는 것일까. 그녀는 세상의 지독한 불공평함에 치를 떨었다.
“컨디션이 조금 더 좋아지면 우리 꼭 한번 봐요.”
도연의 제안에 수연은 간절함을 담아 그러자고 답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영영 지켜지지 못했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 대신 들려온 것은 과거 영업팀 동료였던 박 대리의 무심한 전화 한 통이었다. 암이 재발했다는 것, 독한 치료를 견뎌내기에 도연의 육체는 이미 너무 약해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정말 끝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는 사형선고 같은 이야기였다.
*
수연과 도연이 단순한 팀장과 팀원 이상의 감정적 거리를 좁히게 된 계기는 8년 전 부산으로 급히 내려갔던 그 출장길이었다. 같은 팀 박 대리의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에서 시작되었다. 퇴근 무렵 수연이 수화기를 들었을 때 박 대리의 목소리는 울음 섞인 비명에 가까웠다. 그녀는 일본 바이어와의 중요한 계약을 위해 오후에 부산지사로 내려간 상태였다.
“USB랑 샘플 패키지가 가방에 없어요. 분명히 챙겼는데 제가 가방을 바꿔 가지고 온 것 같아요. 내일 오전 10시에 미팅인데…”
“미팅이 오후 아니었나요?” 수연의 안색이 굳어지며 말했다.
“일본 바이어가 갑자기 시간을 바꾸는 바람에 앞당겨졌어요. 제 책상 밑에 있는 샘플 가방을 누가 좀 가져다줘야겠어요.”
“걱정 마세요. 팀장님께 보고하고 제가 가지고 갈게요.”
전화를 끊은 수연이 도연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늘 온화하던 도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번 계약을 놓치면 영업팀 전체가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엄중한 상황이었다.
“수연 씨, 지금 바로 나랑 갑시다. 최종 자료가 담긴 USB랑 샘플 챙기세요.”
도연의 지시는 단호했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수연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박 대리의 책상 아래로 몸을 숙여 샘플 가방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그 짧은 시간조차 아까워 비상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도연은 피가 마르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쥐고 열차 잔여석을 새로고침 했고, 수연은 가슴 위에 샘플 가방을 터질 듯 꼭 껴안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 못 전하면 우리 정말 끝장이겠죠……”
수연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꼿꼿하게 정면만 주시하던 도연이 고개를 돌려 룸미러 너머로 수연의 눈을 똑바로 붙잡았다.
“아니요, 전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고 있잖아요.”
그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수연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가까스로 올라탄 부산행 KTX가 미끄러지듯 플랫폼을 빠져나갔을 때야 두 사람은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좁은 열차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어깨가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평소 같으면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몸을 움츠렸을 수연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살갗을 통해 전해오는 온기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거대한 재난을 막기 위해 함께 밤을 향해 달리는 공범 의식 때문이었을까. 사무실이라는 딱딱한 격식이 만들어냈던 보이지 않는 벽은 서울역의 소음 속에 이미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창밖으로 밤의 어둠이 짙게 깔리는 동안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목숨 걸고 달리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팽팽하면서도 은밀하게 뜨거운 동지애였다.

박 대리는 밤 9시 반이 넘어서야 부산역 광장에서 샘플 가방을 전해 받고는 거의 주저앉을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듯 저녁도 굶은 채 초조하게 기다렸다. 셋은 늦은 요기를 위해 역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히 숟가락을 뜨고 식당을 나오자마자 도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 15분.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KTX가 플랫폼을 떠난 지 정확히 5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팀장님, 막차 끊겼는데요.”
수연이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켜서 ‘운행 종료’라는 붉은 글씨를 보여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퇴로가 잘려 나간 순간, 묘한 정적이 세 사람 사이를 무겁게 감돌았다. 안도감인지 혹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인지 모를 감정이 수연의 척추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때 등줄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보던 박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막차도 끊겼는데 차라리 근처 숙소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저랑 같이 마지막 점검 회의까지 하고 올라가시죠. 제가 혹시 몰라서 근처 호텔에 추가로 방 2개 미리 확보해 뒀습니다. 두 분 오늘 고생 너무 많으셨는데, 이 밤에 무리하게 올라가시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박 대리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눈치 빠르게 숙소 예약 완료 문자를 도연의 눈앞에 밀어 넣었다. 도연은 말없이 거뭇한 부산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건조한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바다를 머금은 습하고 부드러운 밤바람이 세 사람의 살갗을 눅눅하게 적시고 있었다.
도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이 기류에 머물고 싶다는 은밀한 부추김이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박 대리랑 같이 부산지사로 출근합시다.”
도연의 결정이 떨어지자 박 대리는 십 년 감수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수연의 심장은 방금 끊어진 막차의 레일처럼 알 수 없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나란히 오른 엘리베이터 안, 두 사람은 층수가 다른 버튼을 눌렀다. 수연은 5층, 도연은 7층에서 내렸다. 방으로 들어온 수연은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친 뒤 호텔 가운을 걸쳤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온종일 몸을 지배했던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간 자리에 낯선 도시가 주는 서늘한 흥분이 조심스럽게 차올랐다. 베란다 창밖으로는 해운대의 밤바다가 거대한 검은 짐승처럼 웅크린 채 일정하게 파도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결국 수연은 룸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차가운 오렌지주스를 한 병 사 올 생각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마다 새콤한 주스를 들이켜면 감쪽같이 정신이 투명해지곤 했다. 수연의 집 냉장고 한 켠은 언제나 오렌지주스로 가득 차 있었다.
호텔 로비는 낮의 분주함이 모조리 증발해 버린 거대하고 고요한 수조 같았다. 그때 커피숍 구석 창가 자리에 꼿꼿하게 웅크린 실루엣 하나가 수연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연이었다. 그는 여전히 낮의 정장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만큼은 목을 조이던 매듭을 헐겁게 풀어헤친 상태였다. 그의 앞에는 검게 식어버린 에스프레소 잔과 모서리가 닳아 헤진 낡은 수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도연이 고개를 들었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마치 그 시간에 누군가 반드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눈동자에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반가움이 일렁였다.
“수연 씨도 잠이 안 옵니까?”
도연이 수첩을 덮으며 엷게 웃었다. 그 미소는 낮 동안 사무실에서 보아왔던 의례적이고 딱딱한 팀장의 얼굴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네. 몸은 바닥으로 꺼질 것처럼 피곤한데, 정신은 이상하게 더 투명해지네요. 팀장님도 그러신가 봐요.”
수연은 도연의 맞은편 의자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앉았다. 낮 동안 샘플 가방을 사수하기 위해 서울역과 부산역을 짓누르며 질주했던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자정의 커피숍이라는 이 특수한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해체되고 있었다.
“여기 커피, 마감 전인데도 꽤 괜찮네요. 한 잔 더 시킬까요?” 수연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는 해운대의 검은 바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출렁였다. 낯선 도시는 언제나 스스로가 채워둔 빗장을 헐겁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낮의 사무실에서는 오직 건조하고 딱딱한 업무적 문장만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었지만, 따뜻하고 은은한 노란 조명이 내려앉은 테이블 위에서 처음으로 내밀한 사담이 흐르기 시작했다.
“팀장님도 과묵하시지만 저도 사실 타인에게 속내를 내보이는 데 참 서투른 편이에요.”
수연의 고백에 도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저 역시 세상에 대고 떠벌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적어 내리는 게 편한 쪽입니다.”
도연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가슴속에 고여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줄 때마다 서랍 속 노트를 펼친다고 했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문장이라는 그릇에 옮겨 담고 나면,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연은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공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기질도 삶을 대하는 성향도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인생을 지나칠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탓에 늘 스스로를 팽팽한 긴장 속에 가두고 옥죄며 사는 부류였다. 말 한마디를 내뱉기 전에도 몇 번씩 속으로 곱씹는 이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다치고 멍드는 편을 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지탱하고 매일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에너지는 결코 거창한 성취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의 환한 미소, 정성껏 내린 커피의 첫 모금, 만년필 끝에서 사각거리며 퍼져나가는 잉크의 푸른 번짐, 누군가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던 찰나의 배려 같은 것들. 그 미미하고 소소한 풍경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비로소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간신히 지탱해주고 있었다.
화제는 밤의 공기를 타고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탐독했던 러시아 고전으로 흘러갔다. 두 사람의 입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동시에 터져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는 깊은 동질감의 불꽃이 튀었다.
“어느 쪽을 더 좋아하세요? 톨스토인가요, 아니면 도스토옙스키인가요?”
수연의 질문에 도연은 잠시 유리창 너머의 검은 파도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너무 광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을 끝까지 파헤쳐서 결국 독자를 녹초로 만들죠. 저는 차라리 톨스토이의 그 거대한 평온함을 좋아합니다. 태생은 고귀한 귀족이었으면서도 결국엔 흙먼지 가득한 농민들 틈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 고집스러운 인간애 말입니다.”
“저도 그래요. 특히 그가 말년에 자신의 책 인세를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남겨진 그의 아내가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받았을지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가족의 입장에서는 분명 피눈물 나는 원망이었을 텐데 말이죠…….”
수연의 말에 도연의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아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톨스토이에게 글과 그로부터 나온 결과물은 단순히 가족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도달한 최종 결론이었을 테니까요. 평생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가장 고귀한 신념을 세상에게 온전히 돌려주려 했던 그 쓸쓸한 노인의 마음이……저는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그날 밤 수연은 창가에 비친 도연의 옆모습에서 깊고 고요한 고독의 심연을 보았다. 톨스토이를 말하던 도연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슬픔과 동시에, 삶의 궤도를 바꾸려는 어떤 단호한 결의 같은 것이 무겁게 섞여 있었다.
“수연 씨는 내 유일한 관객 같네요.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작은 테이블 하나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그 밤 그 공간을 채운 공기는 이미 세속적인 직장 상사와 부하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문장과 기질을 사랑하는 두 영혼이 생경한 도시의 정적 속에서 마주친 짧은 기적이었다. [오독 2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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