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을 울리지 않는 날 – 임인정
1990년대 초반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20대 청춘이었던 우리들은 지금처럼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친구를 만나려면 집 전화로 약속을 잡아야 했고, 약속 장소에 늦으면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을 찾곤 했습니다.
젊음은 거리와 음악, 그리고 사람 속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또래들은 종로와 고양시, 파주시를 오가며 친구들과 자주 모였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청춘을 즐기던 평범한 20대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나이트클럽도 참 많이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평소 자주 가던 고양시의 한 나이트클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평소 북적이던 입구는 텅 비어 있었고, 넓은 주차장도 썰렁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음악 소리도 없었습니다.
‘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입구에서 직원 한 분이 나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1년 중 공식적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 날입니다.”
잠시 후 이어진 한마디,
“현충일에는 풍악을 울리지 않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친구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부끄러움은 제 마음속 깊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 당시 젊었던 우리는 현충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쉬는 날 정도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현충일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나라를 지켜낸 수 많은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었습니다.
매년 6월 6일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합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현충일은 1956년부터 국가 추모일로 지정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6월 6일이라는 날짜는 예로부터 망종 무렵으로,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 농사의 시작과 더불어 조상과 선열을 기리는 의미를 담아 선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충일에는 정부 주관 추념식이 열리고, 국립묘지 참배와 추모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됩니다. (위키백과)
무엇보다 현충일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도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 조기(弔旗) 게양입니다.
조기는 깃봉에서 태극기 세로 길이만큼 내려 달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행정안전부)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도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웃을 수 있는 것도, 가족들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평화 덕분입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현충일은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집에 보관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오늘 태극기는 다른 국경일처럼 다는 것이 아니야, 슬픈 날이기 때문에 태극기를 내려서 다는 거야”라고 이야기한 후 마을회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묵념을 하는거야“라고 두 아이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현충일이 오면 조용히 그 의미를 돌아봅니다.
태극기 앞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세월은 흘러 철없던 20대 청춘은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손자를 보게 되었고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문득 그날이 떠오릅니다.
1990년대 초반 어느 현충일, 고양시의 텅 빈 주차장
그리고 조용히 들려오던 한마디
“현충일에는 풍악을 울리지 않습니다.”
그날의 부끄러움은 지나간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저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현충일이 우리에게 남겨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전 파주신문사 기자
- 전 신산초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위원
- 현 국공립어린이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