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현수간, 선비의 마음을 전하다 – 강근숙

옛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가족이나 벗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편지였다. 고향을 떠나 관직에 있거나 유배지에서 한 자 한 자 붓으로 적어 보내는 편지는 소통의 수단이자 세상을 향한 유일한 출구였다. 편지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글이어서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 시대 몸소 성리학을 실천하고 학문을 하던 선비들이 깨어있는 정신으로 주고받은 편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하게 살아온 선비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아픔과 삶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난다.
우리 고장 파주에는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며 편지를 주고받던 선비들이 살았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깊었으면 한 마을에 하나 세우는 서원書院을 네 곳이나 건립해 학풍을 드높였을까. 조선 중기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했던 유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1534~1599)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본향도 같은 지역일 뿐 아니라 도우道友로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이란 세월을 두고 주고받은 편지, 삼현수간三賢手簡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당시 생활상이나 역사적인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415호로 지정되었다.
삼현수간은 구봉 송익필이 죽기 직전에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편지를 모아 만든 책이다. 소장자가 개인이라 1989년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는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었다. 우리 고장 선현들의 편지글 삼현수간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우계재단 성유경 씨가 영인본을 구해주었다. 편지 각 면에는 ‘황강사계창주고가黃岡沙溪滄洲古家’라 새긴 도장이 찍혀있다. 황강黃岡은 사계 부친 김계휘의 호이며, 창주滄洲는 사계 손자 김익희의 호인 것을 보면, 삼현수간이 율곡과 구봉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집안으로 소유자가 바뀌어 대대로 전해왔음을 알 수가 있다.
초서체로 쓴 삼현수간 원문을 들여다본다. 영인본이라 글씨도 흐릿하지만, 초서라서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16세기 최고 지식인의 글씨를, 선현의 숨결이 느껴지는 친필 편지를, 암호 해독하듯 들여다보며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 옛날 서예를 게을리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편지는 글씨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글이기에 평소 필체를 그대로 볼 수가 있어, 또한 귀한 자료가 된다. 글씨체는 각기 다르지만, 달필로 거침없는 써 내려간 필치가 세 분을 뵌 듯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삼현수간은 연애편지를 보는 것 같아 몇 번을 읽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인간적인 면모와 성품, 학문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삼현의 편지는 개인적인 일과, 성리와 예학에 대해 묻거나 나라를 지키는 방략까지 논의한다. 성혼은 율곡보다 한 살 많고, 구봉보다는 한 살 어렸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편지를 보내는 인편에 차와 약재, 소소한 먹을거리를 주고받는다. ‘이 그리움이 어느 때나 그치겠느냐, 그리움이 간절하여 거의 새신랑 같다’ 표현을 하면서도 학문과 예법을 논할 때는 냉혹하게 지적하고 충고하는 것을 보면 깐깐한 선비 기질이 나타난다. 백여 통 가운데는 율곡과 우계와 주고받은 편지, 율곡이 구봉에게 13통, 구봉이 율곡에게 7통, 구봉이 우계에게 20통, 우계가 구봉에게 49통으로 가장 많은 편지를 썼다.



행초行草로 쓴 우계선생의 글씨는 마치 교본처럼 단정하다. 틀린 글자를 여러 군데 먹칠한 것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허물없음을 알 수 있다. 우계는 구봉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속을 다 털어놓고 궁금한 것을 묻는다. 글을 읽다가도 뜻을 알 수 없는 글자 축저築底가 실사實辭인지, 허사虛辭인지, 묻는 것을 보면 겸손한 자세로 배움에 임한 조선 선비가 존경스럽다. 1577년 겨울 편지에는 국상이 났을 경우 졸곡卒哭 이전에 백성들이 조상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는다.
인종비仁宗妃 인성왕후가 승하했을 때 인근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구봉에게 묻는 편지다. 그 외에도 종가에서 제사 지낼 때, 반찬 수를 몇 가지를 놓는지 진설도를 그려달라거나, 사대부가 세상을 떠난 4일째 되는 날 성복成服과 입관入棺을 같이 해도 되는지를 상세히 증명하여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율곡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현실 대처에 주저함이 없었다. 파산 계곡에 전염병이 돌아 우계가 가족을 파주군 향양리向陽里로 옮기고 관직을 떠나 쉬고 있을 때, 율곡은 녹패祿牌를 하인에게 전하고 봉록을 받아다 주었다. 우계는 공손하고 규범에 어긋나지 않으며 자신의 견해와 소신이 뚜렷했다. 관직에 나가지도 않고 봉록을 받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며 되돌려 보내지 못한 봉록을 바깥채에 보관하고 ‘숙헌叔獻(율곡의 자字)의 서툰 일 처리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구봉에게 하소연을 한다. 대쪽 같은 우계의 성품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수령증까지 손수 써 주고 봉록을 타다 준 율곡은 ‘호원浩原(우계의 자字) 세상에도 없는 임금의 예우를 받으며 물러날 계획을 품고 있다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구봉은 율곡과 우계와 더불어 기호학파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서얼이라는 차별 속에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신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화복은 운명에 있으니 어찌 남을 탓하겠느냐’며 오로지 학문에 몰두해 당당하게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후학을 길러냈다. 글씨는 그 사람의 기질이 드러난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구봉의 초서는 자유자재로 호방한 성품이 엿보인다. 우계에게 보낸 편지에 ‘걱정은 부족한 곳에 있지 않고 많은 곳에 있다’며 ‘다만 우리들의 걱정이란 스스로 수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했으니, 그의 도량이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구봉에게는 훌륭한 벗이 있었다. 당대 최고 지성인 율곡과 우계와는 성리학과 예학을 토론하는 학문적 동지이면서 시국을 논하는 정치적 조력자이기도 했다. 구봉은 벗이라 할지라도 때로 질타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을 했으나, 율곡은 구봉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율곡이 23세 때 과거시험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자 응시자들이 몰려와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율곡은 “송익필이 학식이 높으니 그에게 자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구봉은 자신을 학문적 상대로 인정해준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토론과 대화의 짝을 잃었다고 애통해했다. 율곡과 벗함은 오른팔과 같았으며 우계와는 죽어 저승에서도 변함없는 신교神交라 표현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신뢰와 추앙을 받으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친구를 잘못 만나 미혹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구봉은 ‘두 벗이 있어 어리석고 둔한 성정을 채찍질하여 마음을 한가지로 하였고, 주위 환경이나 욕망에 빠지지 않았다’며 먼저 간 율곡과 우계가 그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삼현수간에는 역사적인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이와 성혼을 편들다 서인으로 지목되어 백운산에서 은거하던 사암思庵 박순朴淳(1523~1589) 선생이 세상을 떠나 애달파하는 얘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지나는 길에 우계의 집에 들렀고 율곡의 집에서 20여 일 머물다 갔으며, 그의 아들 김집이 두 통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얘기, 빈곤한 조헌에게 김모라는 사람이 천리 먼 길에서 양식을 보내오는데, 가장 늦게 안 사람이 이해관계를 떠나 도와준다며 감탄하는 얘기,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계함季涵 정철鄭澈(1536~1593)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준엄한 충고를 하라고 서로에게 부탁하는 얘기는 진정한 벗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삼현수간에는 구봉이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답조여식서答趙汝式書’라 쓴 것을 보면 보낸 편지의 답장인데 분실된 중봉의 편지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뭐라고 썼을까. 백성을 괴롭히는 진상 제도와 잘못된 군역이나 부역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을까, 외침에 직면해 있는 당시 상황을 염려하며 국방강화론을 펼쳤을까. 구봉의 답장에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속에서 형께서는 간과 쓸개까지 다 내어주고 죽기 직전의 위태로운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차라리 내 몸은 잊을지언정 의리를 배반하는 일은 마음에서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여러 해 소식이 끊겼다고 의아스럽게 여기지 말아 달라’ 하였다. 중봉 조헌은 27세에 파주목坡州牧 교수로 임명되면서 우계와 율곡의 문인이 되었고 구봉, 송강과도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편지 내용으로 봐서 당시 당쟁의 화로 피신 중인 구봉을 맞아 중봉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봉은 43세(선조 19년)에 우계, 송강의 등용을 주장하고 구봉을 추천하며 그를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후학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구봉은 중봉의 형제가 세상 떠나자 탄식하며 하늘이 어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탄식하며, 숙헌의 조카딸도 어린 나이에 혼인하자마자 남편을 잃었다고 애석해한다.
삶과 학문에 서로 버팀목이 되었던 파주삼현 율곡, 우계, 구봉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율곡리의 율곡栗谷, 눌노리의 우계牛溪, 산남리의 구봉龜峯, 걸출한 세 선비가 있었기에 우리 고장 파주를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공맹孔孟의 고향,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었다.
같은 세상에서 태어나 서로 학문을 보태고 허물은 질책하며 가난을 함께 나눈 이야기를 삼현수간 아니면 누구에게 들을 수 있겠는가.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였다.
파주삼현坡州三賢과 뜻을 함께한 선비들은 하나같이 초가삼간에 빈한한 생활을 하였으나 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러 기호예학畿湖禮學을 창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율곡과 우계, 중봉은 물론 구봉의 가르침을 받은 김장생과 그의 학문을 사숙私淑한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은 문묘에 배향되어 영원히 그 이름을 남겼다.
교하향교交河鄕校에서 해설하는 날은 대성전 문을 활짝 열고 성현들께 인사를 드린다. 우리나라 18현은 지금도 마주 보고 예를 논하고 나라 걱정을 하고 계시는 듯하다. 편지를 보내는 인편에 오미자, 말린 물고기를 싸주던 우계 성혼이 계시고, 녹봉으로 받은 쌀과 콩을 보내며 자루는 꼭 돌려달라고 부탁한 율곡도 계시다.
율곡을 존경하여 ‘그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호를 후율後栗로 지은 중봉은 정말 율곡 선생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율곡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나의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라며 아우에게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쓰게 하였고,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은 의병들과 금산 전투에 임하면서 “오늘은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며 장렬히 전사했다.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흔적, 나라가 위태로울 때 죽고 살며 나아감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선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삼현수간에서 다시 듣는다.










